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제국 (문단 편집) === [[라벤나 함락|최후의 순간]] === || [[파일:1024px-Roman_Empire_under_Majorian_(460_CE).png|width=100%]] || ||[[아에티우스]]의 암살 이후 서로마 제국의 세력도. 이미 [[서로마]]군은 [[잉글랜드|브리타니아]]에서 철수했고, [[반달족]]에게 [[북아프리카]]를 빼앗겼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히스파니아]]와 [[갈리아]] 곳곳에 게르만족의 세력이 눌러 앉았고, 그 바람에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누더기]]로 변해버렸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갈리아 북부, 달마티아, 그리고 본거지인 [[이탈리아 반도]]뿐이었다. ||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마지막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살해된 뒤 마지막 20년은 스틸리코나 아에티우스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어떻게든 지탱해나갔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사실상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 같은 게르만족 출신 권신들의 입김을 받은 9명의 황제가 연달아 나타났다가 사라지면서 무력하게 몰락해 가는 시절이었다. 다만 이걸 외세에 의해 망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 게르만족 출신이었던 권신들의 대부분은 [[오도아케르]]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로마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간신들이지, 외세는 아니었다. 이 무렵을 전후해 서로마 제국은 [[갈리아]][* 일단 408년에 라인 강이 돌파당한 이후 프랑크족, 알레만니족, 부르군트족이 갈리아에 정착했고, 410년 로마를 약탈한 서고트족이 아퀴타니아 지방에 정착했다. 노비오드눔(현재의 프랑스 수아송으로 서로마 시대엔 노비오드눔으로 불렸다.)을 중심으로 한 갈리아 북서부는 여전히 서로마 제국의 통제하에 있었고,([[수아송 왕국]])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인 486년에 메로베우스(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했다.], [[브리타니아]][* 383년부터 현재의 웨일스 지역은 서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었다. 407년 마지막 로마군이 반역자 [[콘스탄티누스 3세]]와 함께 갈리아로 떠나고, 호노리우스 황제가 브리타니아에 대한 사실상의 포기 선언을 내리면서 브리타니아는 서로마 제국에서 반강제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히스파니아]][* 서게르만계 수에비족이 북서부의 갈리시아 지방에 정착했고, 동게르만계 반달족이 한때 이 지역에 정착했으나 아퀴타니아 지방에서 밀고 들어온 동게르만계 서고트족에게 쫓겨나 북아프리카로 다시 이주했다.], [[북아프리카]]의 '변경'에 서게르만계의 [[프랑크족]], [[수에비족]], [[앵글로색슨족]]과 동게르만계의 서고트족, [[부르군트족]], [[반달족]] 등이 잇따라 침공해 정착함에 따라 군사력이 계속해서 약해졌다. 서로마 제국의 정치적 영향력의 약화와 맞물려, 점차적으로 [[이탈리아]]와 몇몇 속주들의 일부분을 다스리는 수준까지 제국의 영토가 축소되었다. 물론 최후의 순간까지 갈리아 북부[* 이 지역의 로마 세력은 서로마 제국이 망한 뒤에도 이른바 [[수아송 왕국]]으로 남아 상당 기간 세력을 존속했다. 갈리아 지역에서 로마 세력이 완전히 말소된 건 487년 메로베우스(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국왕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수아송 왕국이 멸망하고, 마기스테르 밀리툼이었던 [[시아그리우스]]가 처형된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발칸 반도 일부 지역, 달마티아 지역[* [[율리우스 네포스]]가 지배하는 반독립 영역.]을 영유하고, 수백만 명의 인구를 유지했기 때문에 내부 개혁과 정치적 안정에만 성공했다면 건재할 수도 있었다. 이 시점에서 서로마 제국은 예전부터 안정된 물자와 자원을 뽑아낼 수 있었던 이탈리아 본토를 중심으로 재건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영민한 [[마요리아누스]] 황제의 통치로 구체화되었다. 455년 반달족의 로마 약탈 도중 당시 황제였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살해되자 차기 황제로 갈리아 주둔군과 로마 원로원의 지지를 받은 [[아비투스(로마)|아비투스]]가 등극했다. 갈리아 사령관이었던 아비투스는 주둔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했으며 [[동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키아누스]]에게 자신의 황제 지위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은 [[아비투스(로마)|아비투스]]는 이탈리아에 잔류한 반달족들을 몰아냈지만 해군이 빈약한 서로마 제국을 노린 반달 왕국의 침공은 계속되었다. 이후 아비투스 황제는 456년 캄파니아의 카푸아에 상륙한 반달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서게르만계 수에비족과 동게르만계 서고트족의 혼혈이었던 [[플라비우스 리키메르]]를 카푸아로 파견하여 반달족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냈다.('''카푸아 전투''') 하지만 [[아비투스(로마)|아비투스]]는 그의 본거지였던 갈리아 출신의 인물들을 등용했고, 라틴계 인물들이 주류였던 로마 원로원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리키메르는 이 기회를 노려 반란을 일으켰다. 456년 파죽지세로 라벤나로 진군한 리키메르와 그의 친구인 [[마요리아누스]]는 아비투스를 쫓아버리고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 '''로마군 총사령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서로마 제국 말기에는 군 통수권자의 역할 뿐만 아니라 행정과 사법까지 장악했다. 즉 오늘날의 합참의장 + 국무총리 + 대법원장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문•무로 구분했을 때 거의 1:1로 대응되는 최상급의 문관직인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아니'''도 서로마 제국에 있었지만 난세였던 서로마 제국 말기에는 문민 통제의 퇴조로 유명무실해졌다.]이었던 레미스투스(Remistus)를 처형했다. 갈리아로 달아난 아비투스는 군대를 모아 반격을 시도했지만 '''피아첸차 전투'''에서 리키메르-마요리아누스군에게 대패하면서 폐위되었다. 그나마 리키메르는 아비투스를 바로 죽이지는 않고 전투가 벌어졌던 피아첸차의 주교로 임명했는데, 이후 아비투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1년 만에 사망했다. 리키메르는 모든 군권을 장악했는데, 과거 스틸리코와 아에티우스가 황제의 음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참고 삼아 실권을 자신이 가졌다. 리키메르는 제위를 공석으로 남겨두고 권력을 자기가 통제하고자 했지만 원로원과 시민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1년이 지난 457년에 친구였던 [[마요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동로마 제국]]의 [[레오 1세(황제)|레오 1세]]는 [[마요리아누스]]를 서로마 제국의 정식 황제로 인정했고, 능력이 있었던 마요리아누스는 사방에서 도전해오는 적에 맞서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458년 여름 반달족의 침공군을 격퇴하면서 숙적 [[가이세리크]]의 처남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린 마요리아누스는 함대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동쪽 [[아드리아해|아드리아 해]]의 [[라벤나]]와 서쪽 [[티레니아해|티레니아 해]]의 미세눔에 함대를 재건했다. 또한 매우 약해진 군단의 전투력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게르만 부족과 훈족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이며 제국군을 강화하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아비투스(로마)|아비투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아비투스가 황제가 되기 이전 테오도리크 2세에게 지지를 조건으로 히스파니아 속주로의 서고트족의 확장을 용인했었다.] 서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2세]]가 아비투스 황제의 폐위에 크게 반발하며, 서로마 제국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이에 마요리아누스는 첫 번째 원정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했다. 당시 히스파니아에서는 이민족들이 눌러앉기 시작하면서 서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도시와 정착지에서 밀려나는 상황이었고, 마요리아누스의 치세에 와서는 완전히 세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서고트 왕국은 히스파니아 속주의 대부분과 갈리아 남부에 이르는 강대한 왕국이었지만 서고트족 뿐만이 아닌 다른 야만족들이 왕국 아래로 복속된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기에 결속력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마요리아누스]]의 서고트 원정군은 루그두눔([[리옹]])을 점령하면서 [[부르군트족]]을 복속시켰고, 서고트 왕국과 결전을 벌여 갈리아 남부를 수복한 후 히스파니아 본토 깊숙히 진격했다. 긴 공성전을 거치며 사라고사를 점령한 원정군은 타라코를 거쳐 남하했고, 반달 왕국의 증원군을 격파하면서 서고트족이 처음 [[호노리우스]] 황제에게서 받은 갈리아 남서부 지역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탈환했다. 원정군은 여세를 몰아 [[수에비 왕국]]으로 진격했고, 수에비족 또한 최초의 영토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제국에게 몰수당했다. || [[파일:Roman_Empire_460_AD.png]] || || 서기 460년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이끈 서로마 제국 최후의 중흥 당시의 판도 || 성공적인 황제의 원정에 의해 광대한 영토를 수복한 서로마 제국의 국력은 다시금 상승하기 시작했다. 갈리아의 군정장관 [[시아그리우스]]의 지휘 아래 몇십 년 간 버티고 있었던 갈리아와 제국의 중심부가 연결되었고, 히스파니아의 수복된 영토는 제국에게 다시 상당한 세입을 안겨주었다.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서로마 제국 내에서 여러가지 개혁 정책을 단행했고, 부정부패를 청산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원로원과 적대하지 않도록 인선에도 신경을 써서 로마계 인물들을 주로 중용했고, 서로마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정치적 분열 또한 봉합하고자 노력했다. 국경 지대를 안정시킨 마요리아누스는 이번엔 북아프리카 속주를 재탈환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집결시켰다. 북아프리카 원정을 위해 서로마 제국은 재건한 함대와 군대를 대거 카르타고 노바(현 스페인 [[카르타헤나(스페인)|카르타헤나]])에 집결시켰지만 첩자에 의해 정보가 새어나간 탓에 [[가이세리크]]의 기습적인 화공을 받아 함대와 군대가 대패하고 말았다. 결국 대 반달 원정이 참사로 끝나자, 실의에 빠진 마요리아누스는 라벤나로 복귀했고, 그의 활약으로 자신의 권력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를 살해했다. 황제가 살해된 후 기껏 수복했던 서로마 제국의 영토들은, 리키메르가 반역자인 자신을 물리치려는 옛 친구이자 마요리아누스 황제의 충신이었던 [[아에기디우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서고트 왕국과 부르군트 왕국에 팔아 넘기면서 서로마 제국은 유럽에서의 입지가 더욱 더 좁아지게 되었다. 그후 궁정 관료의 좌장이었던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인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즉위했으나 동로마 제국과 서고트 왕국은 물론이고, 반달 왕국도 그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세베루스는 4년 후 리키메르에게 독살당했다. 그러자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차기 황제로 [[안테미우스]]를 보내줬고, 그는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대 반달 원정을 준비했다. 이번엔 서로마 제국 뿐만이 아니라 동로마 제국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대규모 원정군을 꾸렸다. 그럼에도 절대적인 국력 차이 때문에 원정은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다. 468년, 양국 합쳐서 무려 100,000명이나 되는 대군이 편성되었고, 카르타고로 진격했지만 레오 1세의 처남이었던 총사령관 [[바실리스쿠스]]는 군사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가이세리크]]는 평화협정을 핑계로 항구에 원정군의 함대를 주둔시킬 것을 권했고, 바실리쿠스는 그의 말을 믿고 항구에 대함대를 정박시켰다. 그러자 [[가이세리크]]는 7년 전 경험을 되살려 다시 화공을 시전했고 함대의 대부분이 그대로 불에 타버렸다. 원정군이 참패하며 후퇴하자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을 지원할 수 있는 여유가 없어지게 되었고, 동로마 황제의 지원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된 서로마 제국은 국력이 더욱 쇠락해지면서 외세의 침입에 무기력하게 무너졌다.('''[[본 곶 해전]]''') 동•서로마 제국의 대함대가 전멸한 후 가이세리크는 무력화된 [[시칠리아]] 섬을 점령하면서 서로마 제국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본 곶 해전의 참패로 서로마 제국에는 더 이상 대외 원정을 할만한 여력의 군사력이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468년에서 470년 사이에, 그나마 명목상으로 로마 제국의 봉신국임을 자처하던 게르만계 왕국들이 서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제국 영토의 대부분에 눌러앉아있었던 이민족들이 제국에서 이탈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와 아주 일부 지역을 제외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별다른 저항조차 없이 [[서고트 왕국]]이나 [[프랑크 왕국]] 등 게르만계 왕국에게 넘어갔다. 결국 [[안테미우스]] 황제는 리키메르와 [[올리브리우스]]의 음모로 살해당했고 472년 올리브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하지만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안테미우스의 암살 배후에 리키메르와 올리브리우스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올리브리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올리브리우스가 황제로 등극한지 40일 후 최악의 권신이었던 리키메르가 급사하면서 그가 옹립한 황제 올리브리우스의 권위는 바닥을 쳤고, 게르만계 장군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정치적인 암투를 벌이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내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올리브리우스를 암살한 동게르만계 [[부르군트족]] 출신의 군도바트(군도바두스)는 4개월 후인 473년 [[글리케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무기력한 황제는 이탈리아 반도로 동•서고트족이 침공해오자 황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갈리아를 약탈하도록 권할 정도였고, 군도바트의 꼭두각시라며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그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레오 1세는 [[율리우스 네포스]]에게 군대를 지원해 글리케리우스를 퇴위시키도록 했고, 동로마의 원군을 등에 업은 율리우스 네포스는 라벤나를 포위했다. 이에 [[글리케리우스]]가 항복하면서 율리우스 네포스가 황제로 등극했다. [[율리우스 네포스]]는 레오 1세의 지원 아래 서로마의 황제가 되었으나 한때 훈족의 왕 아틸라에게 부역했다가 리키메르의 부하가 되었던 로마인 [[오레스테스#s-2|오레스테스]]와 서로마 제국 귀족들의 반란으로 아드리아 해를 건너 달마티아로 피신했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했다. [[파일:external/medias.photodeck.com/001055_xgaplus.jpg|width=300]] 당시 서로마 제국의 군대는 대부분 용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민족 출신 용병들은 금전 대신 봉급으로 땅을 요구했지만 오레스테스가 이를 거절했고, 이에 분노한 [[오도아케르]]를 필두로 한 이민족 용병들이 일제히 봉기했다. 로마를 초토화시킨 이들은 오레스테스를 향해 진격했고, 오레스테스는 몸을 피해 파비아로 도망쳤지만 뒤따라온 오도아케르의 군대에 잡혀 참수되었다. 476년 9월, 오레스테스가 죽은 후 오도아케르는 수도인 라벤나로 진격했고, 오레스테스의 형이자 어린 황제의 백부였던 파울루스가 남은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우러 갔지만, 라벤나 근교에서 패배한 후 라벤나에서 농성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틀 뒤 성문이 돌파당하면서 파울루스는 병사들과 함께 오도아케르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라벤나 함락]]''') 결국 서기 476년 게르만족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 동게르만계 스키리족 출신이다. 부친은 한때 훈족의 왕 [[아틸라]]의 신하였던 '''에데코'''였다.]와 제국의 실권자인 오레스테스[* 로마인이었으며, 오도아케르의 부친인 에데코와 함께 훈족의 왕 아틸라의 신하로 일했었다.]가 내전을 벌인 끝에 오레스테스와 그의 형제인 파울루스가 오도아케르에게 제거되고,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가 오도아케르의 군대에게 함락됨으로써 오레스테스가 세운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고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엄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 황제가 건재했기 때문에 '''서방 영토의 상실일지언정, 로마 제국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물론 동로마 황제 [[제노(로마)|제노]]의 눈치를 본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의 폐위 직후, 황제의 '어의'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면서, 자신을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로마 황제가 엄연히 군림하는데 [[이탈리아 반도|이탈리아]]의 황제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도도 있었다.] 동로마 황제 제노는 >"일찍이 오레스테스가 쫓아낸 [[율리우스 네포스]](로물루스 황제의 전임자)가 아직 (달마티아에) 건재하지 않느냐" 며 네포스 복위를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는 정작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이 문제를 방치하여[* 당시 동로마 제국도 국내외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것을 방관했지만 황제 제노를 포함한 어떠한 로마인들도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반도 지배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몇 년 뒤 동로마 제국은 발칸 반도에 주둔하던 동고트족을 [[테오도리크]]의 지휘하에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이탈리아로 보내 오도아케르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테오도리크가 [[동고트 왕국]]을 세워서 반독립세력이 되어 버려 이탈리아 탈환에는 실패했다. 사실 이것은 영토 수복보다는 두 [[게르만족]]을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의 목적이 더 강했다.] 사실상 서방 제국의 소멸을 인정했다. 그래도 [[달마티아]]에서 기반을 닦아 온 전임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는 동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복귀하게 되었지만 이탈리아 수복 계획을 세우던 중 [[480년]]에 암살되었고, 같은 해 오도아케르의 침공으로 달마티아가 무너지면서 서로마 제국은 완전히 끝이 났다. 로마 왕정의 건국자인 [[로물루스]] 및 로마 제정의 창시자인 [[아우구스투스]]와 최후의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이름이 같았는데[* 참고로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여 새 시대를 열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이름이 같은 [[콘스탄티누스 11세]] 때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했다.], '''건국 1,229년 만의 멸망이었다.'''[* 동로마는 이후에도 1,0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존속하다가 '''건국된지 2,206년 만에 멸망했다.'''][* 로마 건국의 연도가 기원전 753년이라는 기록에 따라 계산한 것인데, 당대의 기록이 아닌 후대의 기록이라서 실제 연도와는 다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에 해당되는 지역[*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달마티아, 이탈리아 반도]들을 게르만족에게 뺏긴 것이지, '로마 제국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7> [[파일:3039fbd4294657528f48aa1c69beb1c6.jpg|width=100%]][br]{{{#fff 서기 476년 말의 유럽 대륙}}} || ||<-3> || [[프랑크 왕국]] ||<-3> || ||<-7> || || ||<-2><|3> [[서고트 왕국]] || [[부르군트족|{{{#0275d8 부르군트 왕국}}}]] ||<|3> [[오도아케르|{{{#0275d8 오도아케르 왕국}}}]] || [[동고트 왕국]] || || || [[수에비 왕국]] ||<|2> || [[율리우스 네포스]] ||<|3> [[동로마 제국|{{{#0275d8 동로마 제국}}}]] || || || {{{#ddd ·}}} || ||<-2> ||<-4> 반달 왕국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